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봉기 (문단 편집) === 독일군의 진압 === [include(틀: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S73507,_Erich_von_dem_Bach-Zelewski.jpg|width=27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Bundesarchiv_Bild_183-S73495%2C_Oskar_Dirlewanger.jpg]]||[[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Bundesarchiv_Bild_101I-280-1075-11A%2C_Russland%2C_Brigadekommandeur_Borislaw_Kaminski.jpg]]|| || [[에리히 폰 뎀 바흐]] [br] (봉기 진압 사령관) || [[오스카 디를레방어]] [br] (디를레방어 사단장)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br] ([[카민스키 여단]]장) || |||||| '''나치의 인간백정 3인방'''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97906%2C_Warschauer_Aufstand%2C_Stra%C3%9Fenkampf.jpg|width=100%]] || [[파일:Warsaw_Uprising_Aserbeidschanische_Feld-Bataillon_111.jpg|width=100%]] || |||| 봉기 진압을 위해 투입된 디를레방어 사단과 아제르바이잔계로 구성된 제111보병대대 || >"총통각하, 분명 현 상황은 우리에게 그리 좋지 않습니다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폴란드놈들이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은 '''우리에겐 축복이나 다름 없습니다.''' 우린 기껏해야 5~6주면 이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그리고 700년 동안 독일의 동쪽을 가로막았던 1,600만~1,700만 명의 폴란드인들의 수도인 바르샤바는 완전히 파괴될 것입니다. 폴란드는 더 이상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큰 문제가 안될 겁니다." > -하인리히 힘러, 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의 발생을 히틀러에게 보고하면서 독일군은 첫 날부터 강력한 진압에 나섰다. 얼마 후 파견된 [[디를레방어 여단]], [[카민스키 여단]], [[동방부대|아제르바이잔계로 구성된 제111보병대대]] 등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진격을 개시했는데, 이들 병력 모두 인간백정들로 구성된 병력이었다. 디를레방어 사단의 경우 그 사단장인 [[오스카 디를레방어]](Oskar Dirlewanger)부터 미성년자 성폭행 전과가 있었다. 게다가 이들 부대들이 실제로 거둔 전과는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민간인만 학살하는 상황에 국방군은 물론 다른 '''무장친위대 부대들마저 기겁'''하면서 카민스키 여단장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는 상부로부터 습격으로 위장한 암살을 당하고 디를레방어 여단장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보직 해임되었다. 참고로 디를레방어의 진격속도는 하루에 1.6km도 못갔다. 왜냐면 죽이고 강간해야되니까... 그나마 [[카민스키 여단]]은 디를레방어보단 덜 죽이고 다녔는데 그 이유인즉슨 그들의 진격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 이들 부대가 바르샤바로 투입된 초기 며칠간 적어도 6만 5천의 바르샤바의 시민들이 죽었다. 뒤이어 한스 랄너(Hans Lallner) 휘하 제 19기갑사단이 봉기 진압을 위해 바르샤바로 차출되었다. 2개 집단으로 편성된 독일군은 우선 보급로 개방을 위해 오호타(Ochota) 지구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처럼 집집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봉기 개시 2주 후, 독일군은 도심에서 기갑병력을 동원, 봉기군을 공격했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봉기군은 뒤이어 반격했으나 독일군이 장갑열차를 동원하는 바람에 반격은 실패했다. 독일군의 공세는 9일부터 18일까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에 집중되었다. 독일군의 폭격과 포격에 대공망이 사실상 전무한 봉기군은 거의 대응할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구시가지와 은행 광장은 초토화되었다. 독일군은 부상당한 봉기군이 모인 병원에까지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로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일부 병원에서는 심지어 [[분살]]까지 일삼았다. 더군다나 볼라 지구의 성 라자루스 병원에선 1,360명 이상의 환자와 병원 직원들이 집단학살당했다.[* 출처:2차 대전의 마이너리그] 구시가지는 8월 14일 끝내 독일군에 함락당했다. 이곳에서 봉기군과 독일군은 각각 7천 5백, 4천의 사상를 냈고, 시민도 3만여 명이 사망하고 7천 명이 부상당했다. 부상자가 포함된 3만 7천여 명이 바르샤바 시내로 도피했다. 구시가지에 남겨진 민간인들은 독일군이 점령하는 과정에서 모두 학살당했다.[* 당시 독일군의 진압 목표부터 바르샤바를 철저한 본보기 삼아 짓밟는 것이였기에 초기 볼라 지구와 오호타 지구 점령시점부터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고 최종적으로 약 한달간 20만명에 이르는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구시가지에서의 봉기군의 영웅적인 항전은 후에 폴란드인들의 뇌리 속에 깊이 뿌리박혔다. 9월 2일 경 봉기군은 구시가지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구시가지가 독일에 점령된 후 뒤이어 바르샤바 [[수력발전소]]가 독일군에 함락되었고, 8월 17일 무렵 독일은 [[600mm 자주박격포 칼]][* 600mm 버전과 540mm 버전이 각각 하나씩 투입되었다.]과 '''[[구스타프 열차포|800mm K(E)]]''',[* 이 녀석은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모든 무기 중에 단순 화력만 치자면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현재까지 나온 모든 대포들 중에 [[M65|아토믹 애니]]와 [[2B1 오카]]를 제외하면 이 녀석만큼 강력한 것은 전무후무했으며 강력한 만큼 엄청나게 비싸서 단 1문만 만들고 2호기는 공사하다 중단했으며, 포탄 운동에너지 18억 줄에 진지구축작업만 3주가 걸리고 [[세바스토폴]]에서 실전을 겪었을 때는 세바스토폴 시가지에 높이 12m, 넓이 12m의 크레이터(...)까지 생길 정도의, 무장한 적들을 향해 쏴도 돈 아까운 무기의 포구를 '''바르샤바의 비무장 시민들''' 쪽으로 향하게 한 것이다! 여담으로, 당시 쓰인 800mm 철갑탄 한발이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 현재 전시되어 있다.] 원격 조종 대전차폭탄 [[골리아트]] 등을 투입시켰다. 18일까지 봉기군과 구시가지의 시민들은 도심으로 쫓겨 들어갔다. 바르샤바 곳곳에서 매우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하인리히 힘러]]가 이 전투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견했을 정도로 치열했다. 봉기군은 곳곳에서 공격해 오는 독일군들을 막아내는가 하면, 포위된 독일군들을 힘들여 분쇄해 나갔다. || [[파일:attachment/Karl-Gerät_040-00001.jpg|width=100%]]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rsaw_Uprising_-_Prudential_Hit_-_frame_2a.jpg|width=100%]] || |||| 바르샤바를 향해 발포하는 [[600mm 자주박격포 칼|칼 자주박격포]][* 사진에 찍힌 차량은 "치우(Ziu)"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 실물을 [[쿠빙카 전차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와 그 포탄에 맞아 터지는 푸르덴셜 빌딩.[br]독일군은 이런 식으로 바르샤바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푸르덴셜 빌딩은 전후에 복구되어 '호텔 바르샤바' 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영업 중이다.] || 폴란드 봉기군은 볼라 지구 함락 이후 좀 더 증강되었다. 바르샤바의 봉기군은 계속 저항했지만 독일군의 공격에 저항선은 차례차례 무너져 갔다. 심지어 독일군은 아이들과 여자들을 독일군의 전차 앞에 묶고서 저항군을 공격했는데, 이는 저항군이 전차에 총을 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아이들과 여자를 인간방패로 이용한 것이다. 8월의 뜨거운 날씨에[* 폴란드에게 닥친 1944년의 여름은 유난히 덥고 뜨거웠다고 한다. 너무나도 뜨거워서 도로의 아스팔트가 물렁물렁해질 정도였다고.] 방치된 시체들이 썩어나갔고, 수도와 전기가 끊긴 바르샤바에는 [[전염병]]까지 돌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식량 사정이 상당히 심각했는데, 무기 비축도 못한 마당에 식량이라고 사전에 비축할 수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치는 폴란드 점령 이후 배급제를 실시했는데, 폴란드인들은 유대인보다는 더 많은 식량을 배급받긴 했는데 그래도 1일 섭취량에 미달하는 분량이었다. 식량 비축이 가능할 리가 없다.] 소련측이 항공보급 등을 통하여 지원을 해줄 수는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스탈린은 바르샤바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 스탈린 눈에는 나치나 바르샤바의 봉기군이나 어차피 다 소련에 대항하는 '''적'''들일 뿐이다. 누가 이기든 소련군은 힘이 다 빠진 승자를 처리하고 바르샤바를 점령하면 그만.] 결국 절망에 빠진 바르샤바에는 식량난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소빈스키(Sowiński) 대대가 바르샤바의 [[맥주]] 양조장을 점령하고[* 소빈스키 대대는 결사적으로 맥주 양조장을 방어했고, 봉기 종료 시까지 양조장 자체는 지키는 데 성공했다.] 저장된 보리를 시내로 옮긴 덕분에 바르샤바 시민들은 잠깐이나마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내군은 봉기를 선전하기 위하여 뉴스 영화도 제작했다. 안토니 보흐지에비치(Antoni Bohdziewicz)가 이끌던 선전단은 각종 뉴스영화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8월 13일, 첫 뉴스영화가 제작되어 황금 거리(Złota Street)의 팔라디움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각종 신문과 잡지들도 제작되어 시민들에게 봉기에 관한 소식과 정보를 제공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